나는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고즈넉한 파도 소리와 짭조름한 바다 내음은 아주 어릴적부터 내 생활의 일부였다. 여섯살때 바닷가 해변에서 수영을 배웠고 초등학교때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뗏목을 타고 놀기도 했다. 해질녘이면 방파제 근처를 산책하기도 했는데 곳곳을 기어다니는 수많은 갯강구들은 봐도봐도 적응이 되기는 커녕 내 팔뚝에 늘 닭살을 돋게 만들었다. 머리가 조금 커지고부터는 바닷가 모래 위에 앉아 음악 듣는걸 좋아했다. 어쩌다 해안가에서 뛰놀고 있는 꼬마의 움직임이 내 귀에 꼽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묘하게 들어맞을때면 마치 내가 영화속의 한장면에 들어와 있는것 같은 착각이 일곤 했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학교는 마치 드넓은 정원 같았다. 여름이면 수많은 나무들이 초록빛으로 무성해지고 알록달록한 수국들이 교정 곳곳을 수놓았다. 잔디 운동장엔 푸릇푸릇한 풀들이 차오르고 언덕배기에 있던 원두막 근처에선 매미들이 울었다. 이따금씩 미술선생님은 우리를 원두막으로 보내 풍경화를 그리도록 했는데 열 채 정도 있는 원두막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재잘거리고 있다보면 하얀 도화지는 이내 웃음꽃으로 물들곤 했다. 그렇다고 그곳의 풍경이 매번 평화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여중과 여고가 공존했던 드넓은 정원의 전투는 거의 식량창고(매점)에서 일어났는데 여학생들의 식탐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 것이어서 그로 인한 싸움은 늘 살벌하고 무서웠다. 싱그러운 초록색 교복을 입은 여중생과 맑은 하늘색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뒤엉켜있는 모습은 마치 청량한 여름 하늘에 불규칙적으로 치솟아 있는 나뭇잎 같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 나뭇잎은 마구잡이로 뜯겨졌고 파란 하늘에는 군데군데 생채기가 났다. 싸움구경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 중 하나지만 그렇다고 넋놓고 서 있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므로 늘 정신줄을 부여잡고 있어야 했다. 실제로 우리반 누구는 싸움꾼 중 한명이 정수기 뜨거운 물을 허공에 끼얹는 바람에 참변을 당한 애꿎은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학창시절 나의 단짝은 매우 쾌활하고 엉뚱한 아이였다. 새학기가 시작된 첫 날 그 아이는 말수가 적고 조금은 내성적이었던 나에게 다짜고짜 "나랑 도시락 같이 먹자" 라고 말을 건넸고 그렇게 단박에 나의 단짝이 되었다. 우리는 매일 교환일기를 쓰고 점심시간이면 함께 노래를 불렀으며 하교 길에는 잔디 운동장에 누워 하늘을 보기도 했다. 라디오 듣는걸 좋아했던 나는 종종 공 테이프에 내가 쓴 멘트와 선곡한 노래들을 녹음해 그 친구에게 선물하곤 했는데 그걸 같이 들으면서 키득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한때 내 꿈은 라디오 작가였다.)
 
 어느해 여름 내 단짝이 자기 가족 여행에 날 초대해 주었는데 난 그 때 내 인생 처음으로 동해를 보았고 환상적인 에메랄드빛 바다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때까지 내가 늘 보아왔던 바다는 어두운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동해는 내 발과 발밑의 보드라운 모래가 보일만큼 투명했고 멀리서 본 동해는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부터가 바다인지 헷갈릴만큼 청명했다. 그곳의 낭만적인 풍경은 마치 이곳이 꿈속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고 우리는 당장에라도 로맨스를 꽃 피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부모님과 함께였던 까닭으로 헌팅이란 그림의 떡이었다는 안타까운 비화.. 그곳에서 머물렀던 3박 4일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신비로운 느낌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지만 그 뒤로 몇 번 더 찾아갔던 그곳은 그때만큼 나에게 황홀경을 선사하진 못했다. 그러고보면 남자들이 왜 그렇게 처음에 집착하는지 조금 이해가 가기도 한다.

 공기가 더운 기운을 머금을 때 쯤이면 어김없이 듣고 싶어지는 음악이 있다. 그 중 단연코 으뜸은 King's of convenience의 곡들. 잔잔하게 울려 펴지는 기타의 선율이 잠자고 있던 여름날의 기억들을 하나 둘씩 끄집어 내준다. 그 때의 시간은 참으로 천천히 흘렀던 것 같다. 맑은 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처럼, 늦은 오후 나른한 고양이의 걸음걸이처럼.

You'll shine like gold in the air of summer
너는 여름 하늘의 금빛처럼 빛날거야
- Gold in the air of summer [King's of convenience]

지금은 수많은 여름의 내가 공존하는 시간.
마음 한 켠에 평화로웠던 그 시절의 영상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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