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책 (117)
정미나닷컴
인생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간다. 그 옛날 날 설레게했던 동네가 고단한 일터로 변하기도 하고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것 같았던 누군가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흘러간다. 『매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는 것이 삶이고, 그곳이 어디든 뿌리를 내려야만 닥쳐오는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어. 그리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꿈만이 가까스로 그 뿌리를 지탱해준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건 아닐 테지. 』 매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긴 했지만 내 인생에서 그것은 어느 정도 의도된 바였다. 스스로를 낯선 곳에 떨구어 놓고 내가 아닌 남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관찰하는 것은 나름 중독성이 있다.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
딱히 계기라고 할만한 게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동네 은행으로 가던 나의 들뜬 걸음걸이와 내 주머니에 있던 꼬깃한 지폐와 동전들, 그리고 그걸 받아주던 친절했던 언니의 표정.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집에 오신 손님들이 과자 사먹으라며 용돈을 주실때면 그걸 모아두었다가 은행으로 달려가곤 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런 내가 참 귀찮았을 법도 한데 고맙게도 그때 은행 창구를 지키고 있던 언니는 그런 날 참 반가워해주고 귀여워 해 주었었다. 한창 재미들려 들락거리던 나의 은행놀이가 언제 어떻게 흐지부지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심혈을 기울여 만든 비밀번호를 아직도 심심찮게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가 아마 나의 재테크 역사의 시초였던 것 같다. 학창시절 교..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 좋아하지만 특히 그의 에세이를 매우 좋아한다. 허세없는 그의 생각과 솔직한 이야기도 좋고 무엇보다 그의 유머코드가 나와 잘 맞는다고나 할까..? 읽다보면 무슨 만화책 읽는마냥 키득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 새 나막신을 샀다며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나는 마침 면도를 다 끝낸 참이었다. 두 사람은 교외로 가을을 툭툭 차며 걸어갔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이건 젊은 사람이 쓴 시군' 이라고 느꼈다. 실제로 1933년에 기야마 쇼헤이는 아직 스물아홉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새 신발을 샀다'며 친구가 불쑥 집에 오는 상황은 그리고 그걸 예사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아직 이십대의 것이니까. 나도 젊을 때는 그런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없다. 유감스럽다고 해야 할는지..
『 인간이 지닌 가장 위대한 재능은 공감능력이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때 그랬던 적이 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등을 돌렸다고 생각되던 시절, 한껏 독이 오른채 날을 세우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라는 생각과 '그래, 그랬단 말이지. 이제부터 누구든 날 건드리기만 해봐. 나도 가만 안있어' 라는 생각들이 뒤엉켜져 나의 머릿속을 잠식해버렸던..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때 상처받았던 마음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수많은 방어기제들이 똘똘 뭉쳐져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낯선 사람에게 미소를 짓거나 인사를 건네는 경우가 현저히 줄어들고 모든것을 부정..
난 심리학에 관심이 많고 그에 종속된 여러 이론들에 꽤 신뢰감을 갖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이렇다 단정짓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지금 너의 이런 행동은 너의 마음속에 이런 심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정도의 조언이라면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덮어놓고 '넌 지금 이렇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틀렸어. 니 마음은 실상 이러이러한 거라고.' 라는 식으로 단정지어 버리는 것은 마치 '난 너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지, 넌 내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아' 라는 말로 들려서 썩 유쾌하지 않다. 내용은 참 일리 있고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았지만 사람들을 상담해주는 황상민 교수의 난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내 말은 절대 틀릴리가 없다라는 식의 말투는 ..
『 참을 수 없는 아픔을 느끼면 그는 자신의 몸을 떠났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무통의 장소에서 아픔을 견디는 다자키쓰쿠루의 모습을 관찰했다. 의식을 강하게 집중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감각은 지금까지도 언뜻언뜻 그의 내면에서 되살아났다. 자신을 떠나는 것, 자신의 아픔을 타인의 것처럼 바라보는 것. 』 어떤 일은 누군가의 얼굴에서 표정을 앗아가고, 어떤 일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아올린다.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낄 때, 그리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심장은 저릿해지고, 머리에는 묘한 파동이 인다. 『 인간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색깔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알아? 인간에게는 제각기 자신의 색깔이 있어서 그..
『 언제부터인가 세상일이 다 그런 식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두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요셉은 둘 중 어느 자리에도 가지 않음으로써 무조건 오답을 택하게 돼 있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저항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게다가 그는 꼭 참석하기를 바라는 작가에게는 편집자가 하루 전쯤 확인전화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전화를 받은 지 꽤 오래된 요셉으로서는 그들의 관리대상 리스트 따위에는 끼든 말든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얼굴을 내비치면 안되었다. 어쨌든 요셉은 이제부터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요셉의 경우 아침형 인간이란 아침부터 비관적인 인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시종일관 시니컬한 퇴물작가 요셉의 시선이 유난히 재미있었던 책. 읽는 내내 작가의 포..
인간에게는 누구나 청개구리 같은 심보가 있다. 일을 하고 있을땐 쉬고 싶고, 쉬고 있을땐 일하고 싶어지는, 그래서 이런 상황이든 저런 상황이든 모두 불만족스럽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그런 심보 말이다. 가고 싶었던 회사의 면접을 준비하며 곧 행복한 출근을 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던 이 책을 첫출근을 며칠 앞둔 시점에 다 읽고 보니 이 책의 처음을 펼쳤던 나와 이 책의 끝을 덮은 내가 아주 먼 거리를 둔 각각의 인물들처럼 느껴져 조금은 기분이 묘하다.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강연은 혼란스러움을 주는 강연이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강연의 내용이 내가 이제까지 해왔던 행동이나 가치관과 상충되어 처음엔 반발심이 일어나고 혼란이 찾아오지만 결국엔 나를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을 주는 강연. 이 책..